촐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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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촐라 왕조는 고대 타밀 문헌에 언급된 초다(Choda)에서 기원하며, 서기 9세기 비자얄라야가 팔라바로부터 탄자부르를 점령하면서 부활하여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라자라자 1세와 라젠드라 1세 시기에 스리랑카, 몰디브, 동남아시아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최전성기를 누렸으며, 촐라의 건축과 예술은 드라비다 양식을 발전시키고 동남아시아에 영향을 미쳤다. 1070년 쿨로퉁가 1세가 즉위하며 후기 촐라 시대를 열었으나, 판디아와의 갈등과 호이살라의 영향력 증대로 점차 쇠퇴하여 13세기 말 멸망했다. 촐라 제국은 힌두교, 특히 시바파를 숭배했으며, 타밀 문학의 황금기를 이끌며 건축, 조각,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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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 왕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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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왕가명 | 촐라 왕조 |
국가 | 촐라 제국 촐라 왕국 세부 왕국 |
민족 | 타밀족 |
종교 | 시바파 힌두교 |
설립자 | 일람쳇첸니(최초로 기록됨) |
건립일 | 기원전 3세기 |
몰락일 | 1279년 |
최후 통치자 | 라젠드라 3세 |
작위 | |
분가 |
2. 역사
촐라는 초다(Choda)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고대 타밀어 문학과 비문에 따르면 그 기원이 오래되었다. 기원전 3세기 아소카의 칙령에는 촐라가 남쪽에 있는 이웃 국가 중 하나로 언급되어 있다.[9] 7세기 이전의 촐라에 대한 문헌 자료는 거의 없지만, 그 이후 사원에 대한 비문을 포함한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있다.
상감 시대의 고대 타밀어 문학, 에리트레아해의 페리플러스(Periplus Maris Erythraei), 프톨레미의 기록, 그리고 《마하밤사》 등 다양한 자료를 통해 촐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특히 《마하밤사》는 기원전 1세기에 스리랑카와 촐라 주민들 사이의 갈등을 설명하고 있다.[10]
일반적으로 촐라는 체라 및 판디아와 같이 아주 오래된 지배층 또는 일족의 이름으로 여겨진다. 촐라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다른 이름은 질리(கிள்ளி), 발라반(வளவன்), 셈비얀(செம்பியன்) 및 체니이다.[11] 질리는 땅을 파는 사람, 발라반은 비옥한 국가의 통치자, 셈비얀은 시비의 후손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타밀어 사전에서 촐라는 소아지 또는 사아이를 의미하며, 판디아 또는 옛 나라의 영역에서 새로 형성된 왕국을 나타낸다.[12]
상감 문학에 따르면 촐라는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수리야밤사의 후손으로 여겨진다.[13] 역사적으로 기원전 3세기경 타밀족 계통의 씨족인 촐라족이 카베리강 유역에 우라이유르를 수도로 하여 촐라국을 세웠다. 촐라는 판디아, 체라와 함께 타밀라캄에 존재하던 3개의 군주국 중 하나였으며,[14] 스리랑카섬에도 영향력을 떨쳤다. 엘랄란이라는 촐라 왕자가 기원전 205년부터 기원전 161년까지 아누라다푸라 왕국을 지배했다는 기록이 《마하밤사》에 남아있다.[15]
전기 촐라의 전성기를 이끈 왕은 카리칼라 왕으로, 베니 전투에서 체라·판디아 연합군을 격파하고 카베리파타남으로 천도하였다. 카리칼라 왕은 카베리강에 거대한 제방을 쌓아 관개농사를 짓도록 하였는데, 이 제방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댐이었다. 그러나 카리칼라 왕 사후 촐라는 쇠퇴하였으며, 서기 250년경 판디아에 점령당하면서 전기 촐라는 막을 내리게 된다.
상감 시대 말기부터 판디아와 팔라바가 타밀나두를 지배하기까지 약 3세기에 걸친 과도기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칼라브라가 타밀 국가를 침공하여 촐라를 몰아냈으며,[19] 6세기에 팔라바와 판디아에 의해 추방되었다.[20] 9세기에 비자얄라야 촐라가 즉위할 때까지 3세기 동안 촐라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19]
탄자부르 안팎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6세기부터 9세기까지 무타라이야르 왕조가 탄자부르를 통치하였으며,[19] 이들은 848년에서 851년 사이에 비자얄라야 촐라에게 멸망하였다. 촐라의 세력이 감소하고 판디아 및 팔라바가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에, 촐라는 우라이유르 인근의 축소된 영토를 계속 통치하였으나, 그 권한은 작은 수준이었다.
칼라브라와 무타라이야르의 지배로 인해 촐라의 위세가 약화되자 촐라의 차리칼란 3세는 칼라브라와 무타라이야르를 촐라 영토에서 몰아내고 팔라바 왕 트릴로사나 팔라바를 물리침으로써 톤다이나두를 차지하였으나, 차리칼란 3세 사후인 서기 550년에 팔라바의 왕 심하비슈누에 의해 촐라는 팔라바의 지배하에 놓였다. 이후 한 동안 촐라 왕실은 타밀나두 남부를 떠나 팔라바에 속한 타밀나두 북부와 안드라프라데시 남부로 이주하였다. 차리칼란 3세의 아들인 난디바르마 촐란은 카다파, 찬드라기리 등 벤카타말라이 북쪽 지역과 칼라티, 넬로르 등 벤카타말라이 남쪽 지역을 통치하였으며, 난디바르마 촐란의 아들 심하비슈누 촐란은 팔라바와 전쟁을 벌였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팔라바국에 항복하고 팔라바, 찰루키아 등과 혼인하였는데, 이들을 이른바 레나트 촐라라고 부른다.
한편 7세기경에는 오늘날 안드라프라데시주에서 촐라 왕국이 번성하였는데, 이 텔루구 촐라는 상감 시대 초기 촐라의 후손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이들이 초기 촐라족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639-640년 칸치푸람을 방문한 중국인 순례자 현장은 "쿨리야 왕국"에 대한 글을 썼는데, 이는 텔루구 촐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20]
8세기경 촐라 지역은 팔라바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촐라 왕가의 후예인 비자얄라야가 판디아와 팔라바 사이의 갈등을 이용해 848년에 탄자부르를 점령하고 팔라바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면서 촐라 왕조가 부활하였으며, 촐라 제국이 형성되었다.[20]
885년 아디티야 1세 치하의 촐라 제국은 판디아 왕조를 격파하고 칸나다 지방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으며 서강가 왕조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 이후 아디티야 1세가 팔라바 왕국을 멸망시키고 톤다이만달람을 점령했다. 925년 파란타카 1세는 스리랑카를 정복했으며, 발랄라 전투에서 라슈트라쿠타의 크리슈나 2세를 물리쳤다.[21] 그러나 파란타카 1세는 타크콜람 전투에서 라슈트라쿠타의 크리슈나 3세에게 패배했고 그의 아들 라자디티야 촐라는 톤다이만달람 지역을 빼앗겼다.
파란타카 2세 치하에서 촐라는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황태자 아디티야 카리칼란이 지휘하는 촐라군은 판디아를 무찌르고 톤다이만달람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후 웃타마 촐라를 거쳐 라자라자 1세가 즉위하였다.
라자라자 1세와 라젠드라 1세 치세는 촐라 제국의 최전성기로서,[22] 이 시기의 촐라 제국은 남쪽의 스리랑카섬과 몰디브 제도에서부터 북쪽의 고다바리-크리슈나강 유역, 동남아시아의 수마트라섬과 말레이반도까지 진출하였다. 라자라자 1세는 1000년에 토지 측량을 실시하였으며,[23] 1010년에는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을 건립했다.[21] 또한 몰디브 제도를 정복하고, 스리랑카섬의 아누라다푸라 왕국을 정벌했다.[22]
1014년부터 황제로 즉위한 라젠드라 1세는 1017년에 스리랑카섬의 아누라다푸라 왕국을 정복하였다. 1019년부터 1024년까지는 북쪽의 오디샤를 정복하고 벵골 지역의 팔라 제국을 물리침으로써 갠지스강 유역까지 진출하였으며,[23] 1025년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을 건설한 후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24] 이후 스리위자야 해군을 무찌르며 인도양 지역의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며,[25] 칸나다의 라슈트라쿠타, 찰루키아 등도 정복했다.[28] 1016년, 1033년, 1077년에 3개의 촐라 외교 사절이 송나라에 파견되었다.[30]
라자라자의 딸은 찰루키아 왕자 비말라디티야와 결혼하였고,[29] 라젠드라의 딸 암만가 데비는 동찰루키아 왕자 라자라자 나렌드라와 결혼하였다.[29] 1070년 아티라젠드라가 암살되자 라젠드라 찰루키아는 쿨로퉁가 1세로서 촐라 황제에 즉위하면서 후기 촐라 시대를 시작하였다.[29]
쿨로퉁가 1세는 벵기를 촐라 제국의 속주로 삼고 아들들을 보내 통치했다. 후기 촐라 왕조는 쿨로퉁가 1세, 비크라마 촐라, 라자라자 2세, 라자디라자 2세, 쿨로퉁가 3세와 같은 통치자들이 이끌었다. 1150년경부터 찰루키아 왕국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30]
1150년에서 1280년 사이, 촐라의 가장 강력한 적대자는 판디아 제후였다. 라자디라자 2세는 판디아 제후 연합을 제압했고, 쿨로퉁가 3세는 촐라의 지배를 강화하고 타밀 국가 등의 전통적인 영토를 유지하였다.
1218년 라자라자 3세부터 마지막 황제 라젠드라 3세까지의 후기 촐라의 지배는 약화되었다. 1215~16년에 마라바르만 순다라 2세에게 패배한 후 촐라 세력의 쇠퇴가 시작되었으며, 랑카섬에 대한 통제권도 상실했다.[30] 라자라자 3세 이후 라젠드라 3세 치하의 촐라는 지속적인 문제를 겪었다. 호이살라는 타밀 국가의 정치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역할을 하였다. 라젠드라 3세는 촐라의 부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마라바르만 순다라 2세를 포함한 판디아 왕자들을 물리치고 판디아를 촐라의 지배에 잠시 복종시켰지만, 결국 판디아에게 패배하였다.
판디아는 마라바르만 순다라 2세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타밀 국가와 스리랑카 등의 영토를 장악하였다.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촐라와 호이살라 연합군에 여러 차례 패배를 가했다. 판디아는 1250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33]
판디아는 호이살라와 촐라를 모두 패주시켰으며,[30]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에 의해 1279년경 호이살라와 마지막 촐라 황제 라젠드라 3세가 패주하며 촐라 제국은 완전히 멸망했고 촐라 왕조는 13세기 말 비자야나가라 제국 시대까지 무명으로 가라앉았다.[30]
2. 1. 기원 (기원전 3세기 이전)
촐라는 초다(Choda)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고대 타밀어 문학과 비문에 언급된 내용을 보면 그 기원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세 후기 촐라는 자신들이 아주 오래된 혈통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서기 150년경 초기 상감 문학에 언급된 내용을 보면 초기 왕조의 왕이 서기 100년 이전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3세기의 아소카 칙령에는 촐라가 남쪽에 존재하는 이웃 국가 중 하나로 언급되어 있다.[9]7세기 이전의 촐라에 대한 문헌 자료는 거의 없으며, 사원에 대한 비문을 포함한 역사적인 기록은 그 이후의 것이다. 지난 150년 동안 역사가들은 고대 타밀어 상감 문학, 구전 전통, 종교 문헌, 사원 및 동판 비문과 같은 다양한 자료에서 촐라에 대한 중요한 지식을 수집하였다. 초기 촐라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주요 사료는 상감 시대의 고대 타밀어 문학이다. 에리트레아해의 페리플러스(Periplus Maris Erythraei)와 후대의 지리학자 프톨레미는 촐라국의 마을, 항구 및 상업에 대한 간략한 정보들을 남겼다. 서기 5세기에 쓰여진 불교 문헌 《마하밤사》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스리랑카와 촐라 주민들 사이에서 발생한 수많은 갈등을 설명한다.[10] 기원전 273년부터 기원전 232년까지 새겨진 아소카 석주 비문에서 촐라는 아소카에게 복속되지 않았지만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있는 왕국들 중 하나라고 언급된다.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촐라는 체라 및 판디아와 같이 아주 오래된 지배층 또는 일족의 이름이다. 주석가인 파리메라자가르는 "촐라족, 판디아족, 체라족과 같은 고대 혈통을 가진 사람들의 자선은 그들의 재산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관대하다."라고 말했다. 촐라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다른 이름은 질리(கிள்ளி), 발라반(வளவன்), 셈비얀(செம்பியன்) 및 체니이다.[11] 질리는 아마도 타밀 단어 킬(கிள்)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단어는 땅을 파거나 쪼개는 것을 의미하며 땅을 파는 사람이나 일꾼의 생각을 전달한다. 이 단어는 종종 네둔질리, 날란질리 등과 같은 초기 촐라 인명의 필수 부분을 형성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점차 사용이 줄어들었다. 발라반은 "발람"(வளம்)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다산 또는 비옥한 국가의 소유자 또는 통치자를 의미한다. 셈비얀은 일반적으로 시비의 후손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초기 촐라의 전설에서 전설적인 영웅은 매를 쫓아 비둘기를 구하기 위해 희생하며 자타카 불교 이야기 중 《시비 자타카》의 주제를 구성한다. 타밀어 사전에서 촐라는 소아지 또는 사아이를 의미하며, 판디아 또는 옛 나라의 영역에서 새로 형성된 왕국을 나타낸다.[12] 체니는 타밀어로 머리를 의미한다.
2. 2. 전기 촐라 (기원전 3세기 ~ 서기 250년)

상감 문학에 따르면 촐라는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가문인 수리야밤사의 후손으로 여겨진다.[13]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3세기경 타밀족 계통의 씨족인 촐라족이 인도 남부를 흐르는 카베리강 유역에 우라이유르를 수도로 하여 촐라국을 세웠다. 촐라는 판디아, 체라와 함께 타밀라캄에 존재하던 3개의 군주국으로서,[14] 판디아, 체라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자주 충돌하였다. 또한 초기 스리랑카의 역사서인 《마하밤사》에 따르면 엘랄란이라는 이름의 촐라 왕자가 기원전 205년부터 기원전 161년까지 아누라다푸라 왕국을 지배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데,[15] 이를 보아 스리랑카섬에도 영향력을 떨치던 것으로 보인다.
전기 촐라의 전성기를 이끈 왕은 서기 120년부터 210년까지 재위했다고 전해지는 카리칼라 왕으로, 그는 일라체첸니의 아들이었다.[16] 카리칼라는 베니 전투에서 체라·판디아 연합군을 격파하고 11 벨리르들을 물리쳤으며, 카베리파타남으로 천도하였다. 아누라다푸라 왕국에서 잡아온 포로 1만 2천여명을 동원하여 카베리강에 160km에 이르는 거대한 제방을 쌓아 관개농사를 짓도록 하였는데, 이 제방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댐이었다. 그러나 카리칼라 왕 사후 촐라는 체라·판디아 연합군의 군세에 밀리며 점차 쇠퇴하였으며, 서기 250년경 판디아에 점령당하면서 전기 촐라는 막을 내리게 된다.
2. 3. 공위기 (3세기 ~ 848년)
상감 시대 말기인 서기 3세기부터 판디아와 팔라바가 타밀나두를 지배하기까지 약 3세기에 걸친 과도기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타밀나두주 북부에서 새로이 출현한 타밀계 왕조인 칼라브라는 타밀 국가를 침공하여 촐라를 비롯한 기존 왕국들을 몰아내고 그 지역을 통치하였으며,[19] 6세기에 팔라바와 판디아에 의해 추방되었다.[20] 9세기에 비자얄라야 촐라가 즉위할 때까지 이어지는 3세기 동안 촐라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19] 아마도 당시 촐라의 세력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버렸던 것으로 추정된다.탄자부르 안팎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6세기부터 9세기까지 3세기 동안 무타라이야르라는 이름의 왕조가 상감 시대 촐라의 영토에 속했던 탄자부르를 통치하였으며,[19] 이들은 848년에서 851년 사이에 탄자부르에서 일랑고 무타라이야르가 비자얄라야에게 생포당하며 멸망하였다.
촐라의 세력이 감소하고 판디아 및 팔라바가 북부와 남부로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에, 이 왕조는 자신들보다 더 성공적인 통치하에 있던 경쟁국들에게 피난처와 후원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촐라는 우라이유르 인근의 축소된 영토를 계속 통치하였으나, 그 권한은 작은 수준이었다. 판디아와 팔라바는 촐라의 세력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촐라 공주를 혼인 상대로 받아들였는데, 아마도 그들의 명성에 대한 배려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의 수많은 팔라바 비문에는 그들이 촐라 국가의 통치자들과 싸웠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영향력과 권력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비자얄라야가 우라이유르 주변 지역의 옛 수도에서 명성을 얻을 때까지 그 지역을 완전히 상실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칼라브라와 무타라이야르의 지배로 인해 촐라의 위세가 약화될려고 하자 촐라의 차리칼란 3세는 칼라브라와 무타라이야르를 촐라 영토에서 몰아내고 팔라바 왕 트릴로사나 팔라바를 물리침으로써 톤다이나두를 차지하였으나, 차리칼란 3세 사후인 서기 550년에 팔라바의 왕 심하비슈누에 의해 촐라는 팔라바의 지배하에 놓였다. 이후 한 동안 촐라 왕실은 자신들의 영토인 타밀나두 남부를 떠나 팔라바에 속한 타밀나두 북부와 안드라프라데시 남부로 이주하였다.
차리칼란 3세의 아들인 난디바르마 촐란은 벤카타말라이 북쪽의 카다파, 찬드라기리, 아난타푸르 및 콜라르 지역과 벤카타말라이 남쪽의 칼라티, 넬로르, 티루파티, 치토르 및 푼가누르 지역을 통치하였으며, 난디바르마 촐란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심하비슈누 촐란은 팔라바와 전쟁을 벌였지만, 그의 후계자들인 순다라난다 촐란과 타난자야 촐란은 팔라바국에 항복하였으며, 팔라바, 찰루키아, 동강가 출신의 공주와 결혼하였는데, 이들을 이른바 레나트 촐라라고 부르며, 영토에 존재하던 숲을 벌목하고 넬로르, 치토르, 푼가누르 및 티루파티와 같은 새로운 마을들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한편 7세기경에는 오늘날 안드라프라데시주에서 촐라 왕국이 번성하였는데, 이 텔루구 촐라는 상감 시대 초기 촐라의 후손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이들이 초기 촐라족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타밀 촐라의 한 지파가 팔라바 시대에 북쪽으로 이주하여 판디아와 팔라바의 지배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639-640년 칸치푸람을 방문한 중국인 순례자 현장은 그 곳에서 수개월 동안 머무르며 텔루구 촐라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쿨리야 왕국"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20] 궁극적으로 이 시기의 촐라 왕들은 타밀나두에서 그들의 지배를 다시 확립할 때를 고대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몇 명의 하급 군주와 혼인관계를 맺어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으려 하였다.
2. 4. 중기 촐라 (848년 ~ 1070년)
8세기경 촐라 지역은 팔라바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촐라 지역의 토후이자 촐라 왕가의 후예인 비자얄라야가 판디아와 팔라바 사이의 갈등을 이용해 848년에 탄자부르를 점령하고 수도로 삼은 후 팔라바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면서 촐라 왕조가 부활하였으며, 촐라 제국이 형성되었다.[20]885년 아디티야 1세 치하의 촐라 제국은 팔라바 제국과 함께 마두라이의 판디아 왕조를 격파하고 칸나다 지방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으며 서강가 왕조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 이후 아디티야 1세가 팔라바 왕국을 멸망시키고 톤다이만달람을 점령했다. 925년 아디티야 1세의 아들 파란타카 1세는 스리랑카를 정복했으며, 발랄라 전투에서 라슈트라쿠타의 크리슈나 2세를 물리쳤다.[21] 이후 파란타카 1세는 타크콜람 전투에서 라슈트라쿠타의 크리슈나 3세에게 패배했고 그의 아들인 라자디티야 촐라는 타크콜람 전투에서 라슈트라쿠타에게 톤다이만달람 지역을 빼앗겼다.
파란타카 2세의 치하에서 촐라는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황태자 아디티야 카리칼란이 지휘하는 촐라군은 판디아를 무찌르고 톤다이만달람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아디티야 카리칼란은 정치적 음모로 암살당하자, 파란타카 2세 이후 웃타마 촐라가 촐라 황제가 되었고, 웃타마 촐라 이후 라자라자 1세가 즉위하였다.
라자라자 1세와 라젠드라 1세 치세는 촐라 제국의 최전성기로서,[22] 이 시기의 촐라 제국은 남쪽의 스리랑카섬과 몰디브 제도에서부터 북쪽의 고다바리-크리슈나강 유역, 바트칼의 콘칸 해안, 말라바르 해안(체라 국가), 동남아시아의 수마트라섬과 말레이반도까지 진출하였다. 라자라자 1세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지닌 통치자였으며 전쟁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열의로 통치 임무에 전념하였다. 그는 자신의 제국을 왕실의 통제 하에 촘촘한 행정망으로 통합함과 동시에 지방 자치를 강화하였다. 그는 제국의 자원을 효과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1000년에 토지 측량을 실시하였으며,[23] 1010년에는 오늘날 남인도 지역의 대표적인 사원들 하나인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을 짓는 등 힌두교 지원에도 힘을 쏟았다.[21] 또한 당시 아라비아 상인들의 주요 거점인 몰디브 제도를 공격해 정복하였으며, 스리랑카섬의 아누라다푸라 왕국을 정벌해 수도인 아누라다푸라를 파괴하는 등 정복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22] 라자라자 1세는 이외에도 강에 댐 등의 시설 등을 건설하거나 무역 지원이나 광산 및 염전 시설들을 건설하는 등 촐라 제국의 내정에도 힘썼다.
1014년부터 촐라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라젠드라 1세는 1017년에 스리랑카섬의 아누라다푸라 왕국을 정복한 후 아누라다푸라 국왕 마힌다 5세를 생포하였다. 1019년부터 1024년까지는 북쪽의 오디샤를 정복하고 벵골 지역의 팔라 제국을 물리침으로써 갠지스강 유역까지 진출하였으며,[23]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025년 타밀나두 지역에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이라는 도시를 건설한 후 촐라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24] 이후 라젠드라 1세는 해군을 통해 동남아시아 지역에 진출하여 스리위자야 해군을 무찌르며 인도양 지역의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며, 이는 스리위자야의 쇠퇴를 야기했다.[25] 당시 기록에 의하면 스리위자야의 수도인 팔렘방을 비롯해 탐브라링가, 케다 등 스리위자야 도시 14곳이 촐라 제국에 의해 점령되거나 약탈당했다고 한다. 라젠드라 1세의 원정은 말레이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으며, 그의 이름은 중세 말레이어 연대기 《세자라 멜라유》에도 기록되었다.[26][27] 그는 또한 칸나다의 라슈트라쿠타, 찰루키아, 탈라크카드, 콜라르 등의 영토를 정복했다.[28] 라젠드라의 영토에는 갠지스-후글리-다모다르 분지,[29] 스리랑카와 몰디브가 포함되었으며,[30] 동인도 해안을 따라 갠지스강까지 이르는 왕국들은 촐라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31] 1016년, 1033년, 1077년에 3개의 촐라 외교 사절이 송나라에 파견되었다.[30] 또한 비라라젠드라 촐라는 다양한 장소에서 벌어진 많은 전쟁에서 서찰루키아 제국의 소메슈바라 2세를 물리치고 비크라마디트야 6세와 동맹을 맺었으며, 11세기 후반에는 스리위자야의 영토인 케다를 정복하였다.
2. 5. 후기 촐라 (1070년 ~ 1279년)
동찰루키아와의 혼인 및 정치적 동맹은 라자라자가 벵기를 침공한 후 통치하는 동안에 시작되었다. 라자라자의 딸은 찰루키아 왕자 비말라디티야와 결혼하였고,[29] 라젠드라의 딸 암만가 데비는 동찰루키아 왕자 라자라자 나렌드라와 결혼하였다.[29] 3대에 걸쳐 동찰루키아 왕족들은 촐라 황실과 결혼했고, 이들은 동찰루키아 왕조만큼이나 촐라 왕조에 대한 소속감을 느꼈다. 벵기의 찰루키아 왕자 라젠드라 찰루키아를 찬양하며 쓰여진 서사시인 칼링가투파라니에 따르면, 그는 "그의 어린 시절을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에서 보냈고 촐라국의 왕자들과 사람들에게 친숙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비라라젠드라의 아들 아티라젠드라가 1070년 내란으로 암살되자 라젠드라 찰루키아는 쿨로퉁가 1세(1070–1122)로서 촐라 황제에 즉위하면서 후기 촐라 또는 찰루키아-촐라 시대를 시작하였다.[29]쿨로퉁가 1세는 그의 삼촌 비자야디티야 7세와 화해하고, 벵기를 평생 통치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1075년 비자야디티야가 죽으면서 동찰루키아 왕조는 끝났고, 벵기는 촐라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쿨로퉁가 1세는 아들들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보내 속주를 통치했다. 쿨로퉁가 1세와 비크라마디티야 6세 사이에 오랜 싸움이 벌어졌다. 쿨로퉁가의 긴 통치 기간은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고 신하들의 존경을 받는 비할 데 없는 성공과 번영으로 특징지어졌다. 쿨로퉁가의 성공은 이후 100년 동안 제국의 안녕을 가져왔지만, 쿨로퉁가는 스리랑카 섬의 영토를 잃고 판디아 영토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후기 촐라 왕조는 쿨로퉁가 1세, 그의 아들 비크라마 촐라, 라자라자 2세, 라자디라자 2세, 그리고 칼링가, 일람, 카타하를 정복한 쿨로퉁가 3세와 같은 유능한 통치자들이 이끌었다. 쿨로퉁가 1세와 비크라마 촐라와 같은 후기 촐라 황제 치하에서도 벌어지던 찰루키아와의 전쟁은 주로 카르나타카의 찰루키아 영토나 벵기, 카킨나다, 아난타푸르, 구티와 같은 텔루구 지역에서 벌어졌으며, 그 후 이전의 호이살라, 세부나, 카카티야와 같은 봉신국들이 꾸준히 세력을 확장하며 마침내 찰루키아를 대체하였다.[30] 비슈누바르바나 지배하의 호이살라에 의한 북부 중앙 카르나타카에 있는 다르와르 점령과 함께, 1149년경 호이살라의 수도인 드와라사무드라를 관리하는 아들 나라심하 1세와 함께 1150년에서 1151년경까지 35년 넘게 찰루키아의 수도를 점거한 칼라추리의 대두와 함께 찰루키아 왕국은 이미 해체되기 시작하였다.[30] 쿨로퉁가 3세 지배하의 촐라는 촐라 황제의 사위인 비라 발랄라 2세가 지배하던 호이살라를 지원하며 찰루키아의 해체를 가져오는데 협력하였으며, 1185년부터 1190년까지 소메슈바라 4세와의 일련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서찰루키아를 물리쳤다. 마지막 찰루키아 왕의 영토에는 찰루키아의 이전 수도인 바다미, 만야케타 또는 칼야니도 포함되지 않았으며, 이로써 1135-1140년 이후로 이름으로만 존재했던 찰루키아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1150년에서 1280년 사이, 촐라의 가장 강력한 적대자는 전통적인 영토에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판디아 제후였다. 이 기간 동안 촐라와 판디아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다. 촐라는 칼링가의 동강가와 정규전을 치렀고, 촐라의 지배에서 거의 독립적인 세력으로 남아 있던 벵기를 보호하였으며, 자신의 봉신국들인 텔루구 촐라, 벨라난티 촐라, 레난두 촐라 등과 함께 동부 해안을 지배하였다. 또한 항상 촐라의 랑카 점령을 전복하려고 시도한 싱할라인들과도 지속적으로 싸웠지만 쿨로퉁가 1세 시대까지 촐라는 랑카에 대한 확고한 통제권을 쥐고 있었다. 이후 라자디라자 2세는 랑카 왕의 도움을 받은 5명의 판디아 제후 연합을 제압할 만큼 충분히 강했다. 쿨로퉁가 3세는 랑카 및 마두라이의 반란과 소란을 진압하여 촐라의 지배를 강화하고 카루부르에서 비라 발랄라 2세 휘하의 호이살라 장군을 물리쳤으며, 타밀 국가, 동부 강가바디, 드라크샤라마, 벵기 및 칼링가의 전통적인 영토를 유지하였다. 그 후, 그는 비라 발랄라 2세와 촐라 공주를 혼인시켜 호이살라와의 우호 관계를 개선시켰다.
그러나 1218년 라자라자 3세부터 마지막 황제 라젠드라 3세까지의 후기 촐라의 지배는 이전 황제들만큼 강력하지 않았다. 라자라자 3세(1146~1175년) 치하의 촐라 제국은 이전만큼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영토를 거의 상실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1215년 쿨로퉁가 3세가 통치할 때까지 촐라 행정과 영토 보전은 안정적이었고 번영하였다. 하지만 1215~16년에 마라바르만 순다라 2세에게 패배한 후 촐라 세력의 쇠퇴가 시작되었으며, 싱할라 세력이 부활하며 랑카섬에 대한 통제권도 상실하고 랑카섬에서 쫓겨났다.[30]
라자라자 3세 이후 그의 후계자인 라젠드라 3세 치하의 촐라는 상당히 약했기 때문에 지속적인 문제를 겪었다. 한 봉건 카다바 족장인 코페룬칭가 1세는 한때 라자라자 3세를 인질로 잡기까지 하였다.[30] 12세기 말에 찰루키아가 쇠퇴하고 호이살라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칸나다국의 주역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그들 역시 찰루키아의 수도를 점령하고 있던 세우나족과 칼라추리족 등 새로운 라이벌의 출현이라는 끊임없는 문제에 직면하였다. 호이살라는 쿨로퉁가 3세 시대부터 촐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 관계는 라자라자 3세 시대까지 지속되었다.[30]
호이살라는 타밀 국가의 정치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타밀 왕국 간의 단결 부족을 이용하여 촐라와 판디아가 모두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게 하였다. 라자라자 3세 치세 동안 촐라 편을 들던 호이살라는 카다바 족장 코페루징가와 판디아를 물리쳤고 타밀 국가에 존재감을 확립하였다. 라자라자 3세의 뒤를 이은 라젠드라 3세는 촐라의 부를 되살리기 위해 과감한 조치를 취한 통치자였다. 그는 북쪽으로 성공적인 원정을 이끌었다.[31] 그는 또한 마라바르만 순다라 2세를 포함한 두 명의 판디아 왕자를 물리치고 판디아를 촐라의 지배에 잠시 복종시켰다. 비라 소메슈와라 지배하의 호이살라는 판디아의 편으로 개입하며 촐라를 격퇴하였다.[32] 남부의 판디아는 강대국으로 올라갔고 결국 호이살라를 칸나다 국가에서 추방했는데, 이들은 촐라의 동맹이던 타밀족 국가였으며 촐라 자체의 멸망은 궁극적으로 판디아에 의해 야기되었다. 판디아는 마라바르만 순다라 2세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타밀 국가와 스리랑카, 남부 체라 국가, 텔루구 국가의 영토를 꾸준히 장악하였다.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촐라와 호이살라 연합군에 여러 차례 패배를 가했다. 1215년부터 판디아는 점차 타밀 지방의 주요 세력이 되어 마두라이-라메스와람-일람 남부 체라 지방과 칸야쿠마리 벨트에서 입지를 공고히 했고, 카베리 삼각주에서 꾸준히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판디아는 1250년까지 아콧, 티루말라이, 넬로르, 비사야와다이, 벵기, 칼링감으로 진출했다.[33]
판디아는 호이살라와 촐라를 모두 패주시켰으며,[30]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칸나누르 쿠팜에서 호이살라를 물리치고 그곳을 탈취하였다.[30] 라젠드라의 치세 말기에 판디아 제국은 번영의 절정에 있었고 외국인 관찰자들의 눈에는 촐라 제국의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보였다.[30] 라젠드라 3세의 마지막 기록 연대는 1279년이다. 라젠드라의 뒤를 이어 다른 촐라 황자가 곧바로 계승했다는 증거는 없다.[30] 호이살라가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에 의해 1279년경 칸나누르 쿠팜에서 패주하고 같은 전쟁에서 마지막 촐라 황제 라젠드라 3세가 패주하며 촐라 제국은 완전히 멸망했고 촐라 왕조는 13세기 말 비자야나가라 제국 시대까지 무명으로 가라앉았다.[30]
3. 사회와 문화
촐라 통치 아래 타밀 지역은 예술, 종교, 음악, 문학 분야에서 새로운 수준의 발전을 이루었다. 이 모든 영역에서 촐라 시대는 팔라바 시대 초기에 시작된 움직임의 정점을 찍었다. 장엄한 사원 형태의 기념비적 건축물과 석조 및 청동 조각은 이전 시대 인도에서 달성하기 어려웠던 수준에 이르렀다.
촐라는 카다람(케다)과 스리비자야를 정복하고 중국과 지속적인 상업적 접촉을 하면서 지역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동남아시아에서 발견되는 힌두교 문화의 영향은 촐라의 유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 프람바난의 거대한 사원 단지는 남인도 건축과 많은 유사점을 보인다.
믈라카 술탄국 통치자들은 말레이 연대기 《세자라 멜라유》에서 자신들이 촐라 황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40] 오늘날 말레이시아에는 페락주의 라자 쿨란처럼 이름이 촐란 또는 출란으로 끝나는 왕자가 많다.[41][42] 촐라 통치는 오늘날 말레이시아에서 기억되고 있으며, 그 예로 페락 주의 라자 쿨란이 있다.[43][44]
3. 1. 행정
촐라는 팔라바 왕국의 만디르 건축술을 물려받아 드라비다식 만디르 건축술을 크게 발전시켰다.[45] 카베리강변에 많은 시바파 힌두교 만디르를 지었으며, 후세 사원의 양식은 아디티야 1세와 파란타카가 공식화했다. 촐라 사원 건축은 팔라바 왕조가 물려준 과거의 풍부한 전통을 계승함과 동시에 그 웅장함과 섬세한 솜씨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45] 건축 역사가 제임스 페르구손은 "촐라 예술가들은 거인처럼 잉태되어 보석상처럼 완성되었다"고 말했다.[46] 후기 드라비다 건축을 대표하는 촐라 예술의 새로운 발전은 판디아 왕조 시대에 점차 형태를 취하고 성숙해진 사원의 외곽에 고푸람이라는 거대한 관문을 추가한 것이다.[47] 촐라의 건축 및 예술은 동남아시아로 확산되며 동남아시아의 건축과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48]사원 건축은 라자라라 1세와 그의 아들 라젠드라 1세의 정복 및 천재성으로 큰 자극을 받았다. 촐라 건축의 성숙함과 웅장함은 탄자부르와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의 두 사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09년경에 완공된 탄자부르의 장엄한 시바파 만디르인 브리하디스와라 만디르는 라자라자 시대의 물질적 업적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당시 모든 인도 사원 중 가장 크고 높은 규모를 지니며 남인도 건축의 정점에 서 있다.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에 있는 강가이콘다촐리스바람 사원은 라젠드라 1세가 전임자를 능가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탄자부르 사원이 건설된 지 불과 20년 후인 1030년경에 같은 양식으로 완성되었으며, 외관이 더 정교해짐에 따라 라젠드라가 통치하는 촐라 제국이 더 풍요로워진 상태임을 보여준다. 이 두 사원은 다라수람에 위치한 아이라바테스바라 사원과 함께 대 촐라 사원이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오늘날에도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49]
촐라 시대는 조각품과 청동으로도 유명하다. 촐라 시대의 조각품은 힌두교의 유지의 신 비슈누와 그의 배우자 락슈미나 파괴의 신 시바의 다양한 모습들을 묘사한 작품들이 대부분으로, 일반적으로 오랜 전통에 의해 확립된 도상학적 관습을 따랐지만, 11세기 및 12세기의 촐라 조각가들은 조각품에 고전적인 우아함과 웅장함을 가미하려고 이전보다 더 자유로운 방식으로 작품들을 조각하였다. 이 양식으로 만들어진 작품들 중 가장 훌륭한 사례로 춤추는 나타라자 동상을 들 수 있다.
3. 2. 경제
힌두교의 부흥은 수많은 사원 건설을 촉진시켰고, 이는 시바파와 비슈누파 경전 문학을 낳는 데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50]3. 3. 종교
촐라의 주류 종교는 힌두교였다. 팔라바 왕조와 판디아 왕조처럼 불교와 자이나교의 부상에 흔들리지 않았다. 초기 촐라 시대의 힌두교도인 코센간난은 상감 문학에서 리쉬로 묘사되며 시바파 힌두교도들에게 칭송받았다.[40]촐라 제국은 주신인 시바를 모시는 만디르들을 많이 지었지만, 촐라 제국의 황제인 아디트야 1세가 시바와 비슈누를 위한 만디르를 지었다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촐라 제국이 시바파 힌두교만을 믿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890년대의 촐라 비문에 따르면 아디트야 1세는 서강가 왕국 서부의 스리랑가파트남에 있는 랑가 나타 사원 건축에 기여했는데, 이 지역은 그의 봉토였으며 결혼으로 연결되어 있었다.[59]
파란타카 2세는 카베리강 유역에 있는 안빌의 비슈누(Vadivu Azhagiya Nambi)의 신봉자로서 비슈누에게 많은 선물과 장식을 봉헌하거나 시바와 비슈누를 위한 수많은 만디르들을 건축하였으며,[41] 칸치와 아코트를 되찾기 위해 라슈트라쿠타를 공격하거나 판디아와 스리랑카에 대한 원정대를 파견하는 등의 전쟁을 시행하기 이전에 비슈누에게 기도를 올렸다.[42] 라자라자 1세는 스리비자야 왕인 스리 출라마니바르만의 요청에 따라 나가파티남에 존재하던 불교 수도원인 추다마니 비하라를 개축하기도 하였다.[43][44]
후기 촐라 시대에 비슈누파[45], 특히 그들의 종교 지도자인 라마누자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46] 이 주장에 따르면, 크리미칸타 촐라라고 불리는 촐라 황제는 라마누자를 박해했다고 하며, 17세기 문학인 <파르파난나므리탐>에서도 크리미칸다가 치담바람 나타라자 만디르에서 고빈다라자 신상을 제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60] 일부 학자들이 크리미칸타 촐라를 쿨루퉁가 2세와 동일시하지만, 스리랑감 사원의 기록에 따르면 쿨루퉁가 2세는 크리미칸타 촐라의 아들이고 크리미칸타와 달리 비슈누파를 지지하였으며,[61][62] 라마누자는 쿨루퉁가 2세를 그의 조카인 다사라티의 제자로 삼았고, 그 후 왕은 라마누자의 소원에 따라 다사라티와 그의 후손들에게 랑가나타스와미 사원의 관리를 허락했다고 한다.[63][64] 역사가 닐라칸타 샤스트리는 크리미칸타 촐라와 아디라젠드라 촐라, 비라라젠드라 촐라를 구별하였다.[65][66] 1160년의 비문에 따르면 비슈누파와 사회 관계를 가진 시바파 힌두교 사원의 관리인은 재산을 몰수당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지만, 이것은 촐라 황제가 공식적으로 선포한 칙령이 아닌 시바파 힌두교 공동체에서 규정한 규범으로 보인다. 촐라 황제가 시바를 위해 촐라 내에서 가장 큰 힌두교 사원을 지었고 라자라자 1세와 같은 황제가 "시바파다세카란"라는 별칭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들의 비문에서 촐라 황제가 촐라 제국이 시바파 힌두교만을 믿거나 시바파 힌두교가 촐라 제국의 국교라고 명시한 내용은 없다.[47][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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